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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회화는 회화

 

장진택(독립기획자)

 

작가의 작업은 예술의 형식에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 위해 기존에 전형화한 상태로 전유되어 왔던, 소위 공적 체계로 미적 매체의 활용 방식에 가시적인 균열을 꾀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논점은 형식 차원에서 행해진 변화가 우리의 인식이나 시스템 뒤에 숨겨진 체제 등의 이데올로기에까지 연동되어 가치로운 변화를 더불어 이끌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다. 강원제 작업을 바탕하는 강한 수행성의 위상은 그의 작업이 목표하는 인식의 전환이 어떠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 전개될지에 나름의 단서를 제공하는 부분 중 하나로도 비친다. 특히나 단지 X축과 Y축의 사이 지점에서만 펼쳐졌던 평면의 범주, 보통은 그에 국한하기에 미적 개념과 인식의 층위에서 이미지라는 표면으로 제 자리를 굳힌 회화라는 매체가 작가의 작업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전담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단일한 작동을 일으키는 듯 뵈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만 제어해 왔던 어떤 방식들은 그가 제안하는 새로운 의미 맥락의 원리에 의해 다시금 제 가치를 잃거나 획득한다. 회화 매체의 활용과 관련해 벌어지는 제작 및 설치 범위에서의 부정성(negativity)은 사진에서의 그것과 유사하게 플라스틱 필름 위에 맺히는 가장 밝은 면으로서의 가장 어두운 부분 혹은 가장 어두운 부분으로서의 가장 밝은 부분처럼 회화에서의 음과 양이나, 그 밝고 어두움이 외재하는 돌출과 함몰의 굴곡이 이루는 제 형성의 결과를 그 역의 방향으로 뒤집어내는 가운데 구축되었던 서사의 면면이 자연스레 다각적으로 노출된다. 그와 같이 일정한 미적 수행이 귀결하는 결과물이 갖는 의미와 가치에 관한 무게를 애초에 감쇄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 그 자체를 작업화함으로써 매체를, 예술을, 나아가 이들 형식이 아우르는 개념을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한다.

 

강원제의 <러닝 페인팅(Running Painting)>(2015-)은 끝내 완성되지 않은 채 연쇄하는 회화다. 그는 작가로서 그리는 일과를 매일 수행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한 캔버스 위에 다중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지속하면서 더는 단일의 이미지가 어떠한 형태의 에너지도 품어낼 수 없도록 한다. 이같이 계속해서 그림을 쌓고 덮으면서 완결된 이미지가 서리는 분위기와 권위를 취하한다. 그처럼 행위 그 자체, 또는 그것을 연속하면서 희석되는 이러한 이미지의 권위와 아우라(aura)는 결과로서의 이미지에 당연히 우선하여 부여되었던 예술의 미적 규범에 반해 이를 그려내는 작가의 행위에로 모든 관람 감각의 운용을 이전한다. 그로부터 작가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작업의 목표를 둘 수 있게 되고, 그가 그린 그림은 말 그대로 과정에서 남겨진 흔적의 결과로서 제 역할과 기능을 다시 수립한다. 이렇듯 <러닝 페인팅>이 완결이라는 회화 영역에서의 보편적 임무를 미완의 효과로 돌려내는 데 집중했다면, 그의 <제로 페인팅(0 Painting)>(2021-)은 본격적으로 끝맺음 없는 맺음의 회화를 작업의 근본으로 삼는 회화 연작이다. 일(1)의 순간으로 점철되거나 그에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하도록 설정된 작가의 회화에서 더는 완성과 결과라는 질서는 중요하지 않다. 이때 추출되는 소멸과 해체의 주제는 작업 외부의 형식과 내부의 개념을 연동케 하는 특정한 계기로 보는 이들을 인도한다. 이상의 과정은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등가적 합치를 이루는 상태를 좇거나 때로는 사라지는 것과 나타나는 것이 마찬가지로 거듭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일종의 윤회적 관계로 예술에서의 정당한 조리가 형성되는 시공을 주조하는 일이면서도 이는 곧 영(0)의 범위로 수렴하는 <제로 페인팅>의 알속이라 할 수 있을 테다.

 

회화라고 하는 매체에의 귀속, 그러므로 목표에 도달하고 영속의 정지 상태로 진입하게 되는 박제된 이미지를 자유롭게 하는 강원제의 방식은 다층적이다. 작가가 행하는 그러한 전위의 전략은 본래는 결과물이자 도달의 목적이었어야 할 작품을 새로운 작업의 출발점이자 그 실천을 위해 소모하는 재창작의 재료로서 본인의 작업을 재귀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붓질로 그려내는 가벼운 이미지를 표상하며 얇고도 얇은 종이 위에 올려진 수많은 색면 패턴의 드로잉들은 자기 완결성을 포기하고 고정된 상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한다. 이에 따라 그의 <무거운 그림(Weighty Painting)>(2017) 연작은 이들 수백 장의 드로잉 작들을 접착해 실제로도 드로잉이라는 형식이 갖는 완성된 무게를 오브제 형 그림이 벗어 던질 수 있게 함과 함께 여전히 제목에 남아있는 “페인팅”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회화라는 형식 안에서 그것을 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로도 이해할 수 있다. <부차적 결과(By-product)>(2018-)의 경우 한층 직관적으로 설치라는 측면에서 회화를 대하는 가능한 태도를 확장한다. 강원제는 비계 구조에 걸린 그림들을 “부산물”이라 칭하면서, 신체를 지탱하는 주요한 뼈대 위에 얹힌 부수적인 산물로 회화의 위상을 전락한다. 그림들은 본래의 지지체인 캔버스를 잃고 이제껏 도맡은 바 없었던 중첩을 위한 부분으로 역할하고, 이로부터 이미지는 “은폐”되고, 그저 그림을 근거하는 어떤 물성만이 고스란히 남겨진다. <선택된, 선택되지 않은 그림(Selected, Unselected Painting)>(2019-)과 <카오스모스(Chaosmos)>(2021-) 연작에서는 더 직접적으로 물리적 형식의 영역에서 회화의 체제에 적극 관여한다. 전자는 마치 한 편의 회화를 일면의 벽지처럼 인식하며 작가의 선택에 따라 포착된 일부분을 전체의 장면으로부터 떼어서 그것에 그와는 구별되는 개별 작업의 지위(selected painting)를 지니게 한다. 또한 그렇게 오려진 그림 역시 작가의 작업 서사 안에서 선택받지 못한 그림(unselected painting)으로의 제 작업적 지위를 새로이 규명 당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하다. 후자는 더 작은 조각들로 나뉜 그림의 파편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형상을 조직게 함으로써 질료와 결과의 구분을 무효하게 한다.

 

작가의 작업들이 대체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수행성을 동반해 회화의 지평을 재정립한다고 하면, <블랙 스타(Black Star)>(2020-)는 실제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측면에서 수행성을 부각함으로써 그려져야 할 것을 그려지지 않게 만들고, 그려지지 않아야 할 것을 그림의 차원으로 되돌려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볼펜으로 채워진 빈 곳은 하늘이 되고, 남겨진 여백은 이제 별이 되어 빛난다. 윤곽선으로 매겨진 견고한 실체는 이를 보는 방식과 관점에 따라 물질적인 세계와 무차별한 공의 세계가 본래는 다르지 않은 것임을 상기한다.

 

기실 Z축을 따라 변화하고 풀려나며 이토록 창발하는 그의 회화에서 작가는 유일한 행위자로서 자신의 수행에 혼신을 다함에 제 역할을 한정한다. 이처럼 완성될 수 없을 그림은 오로지 관람객이라는 작업을 둘러싼 또 다른 객체를 마주할 때만 한시적으로 제 변화의 유동함을 정지한다. 이와 같은 작가의 시도는 곧 회화라는 매체 개념을 바꾸어 냄과 동시에 이를 상회하는 예술, 끝없는 주체들과 객체 그리고 대상들이 혼재하며 생성하는 이 문화라고 하는 범주 또한 그것과 동일한 목표를 설정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규칙과 질서로 엮여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상태로부터 매체, 개념, 형식, 내용 등, 다단한 층위에서 강원제가 창출하는 이 전회는 어쩌면 인간을 관념이라 불리는 틀에서 구출하는 한편, 이로써 이들이 진정한 문화적 자율성을 회복할 최후의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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