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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D 갤러리 전시 서문

지난 2018년 작가는 갤러리 이알디를 통해 <Running painting>를 선보였다. 전시 종료 이후에도 진행된 ‘매일 그리기’ 프로젝트는 단어 그대로 반복적인 행위를 통하여 의미와 목적이 삭제된 순수한 표현을 담아내는 작업이었다. 도달해야할 목표, 종료 지점을 정하지 않고 이루어진 행위는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4년이라는 시간동안 작가는 알 수 없는 사막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사람처럼 점차 허망함과 무의미함에 천천히 잠식되었고. 프로젝트는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수백점의 그림을 남기며 종료되었다. ‘러닝페인팅의 부산물’로 태어난 그림들은 작가에 의해 해체•소멸되며 ‘처리해야 할 대상’에서 ‘새로운 작업<Unselected painting>,<Chaosmos> 을 위한 재료’로 변하였다. 이처럼 끊임없이 그리기(생성)와 만들어진 것의 해체(소멸). 다시 말해, 완성 혹은 결과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사실은 두 개의 극점이 아닌, 서로의 방향으로 향하는 원의 일부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은 멈추지않고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진실은 ‘결과’가 아닌 ‘변해가는 과정’에 있다. 지난 일련의 전시들은 이런 ‘회화의 현재’를 표현하기위해 행위의 과정을 부각시키는 방법을 선택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붓을 놓는 순간 그림은 완성된 결과물, 고정된 형태로 남는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행위는 결과를 낳는다는 딜레마는 작가를 ‘완결이 없는 그리기’ <0 painting>로 이끌기 시작했다.


 

“시작과 끝, 의미와 무의미, 질서와 무질서, 가벼움과 무거움, 생겨나고 사라짐 등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둘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반복 운동이 있을 뿐이다. 나 역시 그림을 그리면서 안착하기를 포기하고 그 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시간이 현재를 지나쳐가면 남는 것은 침묵과 우울함, 상실된 삶의 일부이다. 과거가 아닌 과정의 생동성만이 진실을 자유롭고 선연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과정 자체가 결과물이 될 수 있도록 ‘완결’을 삭제하고, 언제나 과정으로 존재할 있도록 ‘무한한 시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그림에 ‘영원’을 선사했다. 

0페인팅에서 결과물이 된 그림도 다시 그리는 행위를 통해 결과는 사라지고 그림은 과정 속으로 재포섭되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제로가 되는 이 부조리함은 동시에 무엇을 해도 허용되는 무한한 자유로움을 품고 있다. 눈 앞에 나타난 그림은 끝이자 시작이며 의미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영원한 시간 속에 놓인 순간의 형상이다. 그것이 0페인팅에 완결이 없는 이유며, 오늘 전시장에 걸린 그림 역시 언제든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는 이유다. 

 

0페인팅 속의 꽃, 노을, 무지개, 별, 구름, 번개. 모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이다.  겹겹이 덧대는 특유의 붓터치로 쌓아올린 찰나의 순간들은 너무나 조화로워서 우리는 그 순간이 곧 사라질거란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아쉬움과 애정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의 완전하지 않음이 만들어내는 ‘과정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그동안 시간의 흐름이라는 차원에서 과정은 결과를 위한 단계로, 결과는 목표한 완성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제로페인팅에는 ‘변화하는 과정의 생명력’만이 가득 차 있다. 작가는 0페인팅이 가진 특성, 즉 사라진 완결, 과정의 연속, 영원으로부터 회화의 한계점이었던 ‘변화하는 상태’를 도출해낸다. 작가는 한 편의 시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끝이자 시작이며 의미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림의 현재로 안내, 우리의 현재를 또한 마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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