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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없는 게임 Games Without End

 

 

황수경 (독립기획자)

 

 

대상을 그려내기보다 그리는 행위(과정)에 집중하며 화가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강원제 작가는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변수를 마주한다. 완성보다 그것을 지속하는 행위를 통해 회화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기에 그의 일련의 시리즈작업은 완성이라는 어느 한 지점에서 의도적인 훼손과 해체를 통해 새로운 작업으로 재-생성하고 있다고 보인다. 소우주와 같은 캔버스에서 파생된 조각들은 원본의 형체가 사라져 가는 과정에서, 멀어지는 은하의 틈을 채우려 무(無)에서 생겨난 수소가 별이 된다는 옛 주장처럼, 우주에서 가장 풍부하며 가볍고 단단한 구조를 가진 원소로 재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자유로움을 찾고자 한다는 작가의 행위를, 텅 빈 우주가 생성되던 지점의 제로 상태로 되돌아가 새롭게 창조된 물질로 새 은하계를 형성하고 메우는 과정처럼 끝이 없는 게임과 같다고 보고,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의 소설 『우주 만화(Cosmi comics)』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소설 모음 속에는 지금은 빅뱅 이론에 의해 비주류(非主流) 우주론이 된 정상우주론(steady-state cosmology)을 은하계 사이에서 구슬 게임 장면으로 묘사한 ‘끝이 없는 게임 (Games Without End)’에 동명의 제목이 있다. 작가의 '러닝 페인팅'부터 ‘부차적 결과(By-product)’, ‘선택된, 선택되지 않은 그림 (Selected, Unselected painting)’ 그리고 ‘제로 페인팅(Zero painting)’으로 이어지며 다시 무(無)의 상태로 향하는 작업 전개 과정을, 시작도 끝도 없고 영원히 밀도가 일정하고 불변일 것으로 생각했던 정상우주론에 살짝 빗대어 보며 글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우주의 모든 곳이 동등하고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정상우주론에 따르면 우주는 시작과 끝이 없이 영원하다. 허블의 법칙처럼 우주가 팽창하면 물질의 밀도가 점점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이를 상쇄하기 위해 물질이 계속 생겨나서 결과적으로 물질의 밀도는 변하지 않아 이 이론은 빅뱅 우주론 이후 현재는 관측 결과와 어긋나는 점이 너무 많기에 폐기된 이론이다. 그런데 강원제 작가의 ‘카오스모스(Chaosmos)’와 ‘무거운 그림(Weighty painting)'처럼 원본에서 무(無)를 향해 계속 사라지게 하는 행위로 인해 물질의 밀도가 점점 작아져야 하지만, 재창조된 작품으로 새로이 생겨난 물질은 결과적으로 물질의 밀도는 변하지 않고 오히려 무게는 더해져 물리적인 무게가 20~30kg에 가까운 무거운 그림이 되었다. 이에 작가는 제로 페인팅에서는 그려진 이미지에 새로운 이미지가 덧 그려지거나 캔버스 프레임에서 탈각되어 다른 시리즈 작업을 위한 물리적 재료로 전환되고 사라지기 때문에 이는 마치 무지개나 구름처럼 잠시 나타났다 금방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것은 완성이란 이름으로 정지되거나 규정하지 않으려는 현재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작가가 무(無)를 향해 끝없이 도전하는 게임의 장면과도 같다고 보았다. 이 끝없는 게임은 사라지게 하는 행위와 같으나 사라지지 못한 수백 장의 드로잉들이 응집된 '무거운 그림(Weighty painting)'이 ‘무거운’의 또 다른 중의적 의미로 ‘가치 있는’, ‘의미 있는’을 내포하고 생성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로 보아도 되는 것일까? 그래서 그의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가벼움이 무거움이 되는, 혹은 무의미가 의미로 전환되는 순간에 대한 지점을 표시하는 기호로 존재시키려는 것일까? 이러한 반복적인 행위를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블랙스타’에서도 펼쳐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볼펜으로 흰 종이를 채워 어둠을 만들고 남겨진 흰색의 여백이 빛나는 별이 되지만 여기에서도 그는 가벼움을 무거움으로 전환하고 있다. 볼펜으로 수없이 그은 선은 어둠을 무겁게 채우고 텅 빈자리를 빛내는 별은 실체가 없이 가벼운 허상으로 표현하고 이는 새로운 그림을 색출하는 작품들로 이어진다. 다시, '정상우주론'으로 돌아가 보면 우주는 시작과 끝이 없으며, 멀어지고 있는 은하의 틈을 채우기 위해 무(無)에서 새로 수소가 생겨 별이 형성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일치하는 행위로 보인다.

 

실은 작가의 수행성에 관한 이야기는 필자보다 앞선 다양한 비평문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다만 이번 전시의 글에서 칼비노의 소설과 함께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우주만화』 속 화자 크푸우프크(Qfwfq)가 그의 친구 프프우프프(Pfwfp)와 함께 끝없이 서로를 쫓으며 구슬 게임을 하듯, 강원제 작가의 창조적 순간의 예술 행위들을 쫓아가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칼비노의 이 소설을 아는 이라면 이미 눈치챌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화자는 이름에서부터 무한한 순환성을 상징하고 있다.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크푸우푸크(Qfwfq)인 화자의 눈을 통해 우주의 시작과 진화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배경으로 욕망의 본질, 사랑, 외로움과 같은 인간의 문제를 퍼즐과 같은 내러티브 구조와 동화 같은 이미지로 표현한 이탈로 칼비노는 최초의 진정한 포스트모던 작가로 불린다. 이 포스트모던(postmodernism) 시대에 이르러 원본이 없는 복제들이 우리의 현실을 대체하게 되는데, 여기서 잠시 강원제 작가의 원본에서 탈각한 조각들의 원본성에 관해 질문해 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던 이론가 장 보드리야르는 원본 없는 복제를 시뮬라크르라고 불렀다. 모사할 실재가 부재하고, 복제는 되는데 무엇을 복제한 것인지 모르는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시뮬라시옹의 과정에서 예술의 고유성이라는 개념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복제된 것을 또 복제하고, 그걸 다시 복제하는 과정을 맴돌다 보면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키치인지, 원본과 복제품을 구분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도달하게 된다. '뉴 웨이브(new-wave)'는 프랑스 영화 운동인 ‘누벨 바그’의 영어 표현으로 고전적 영화의 전통과 결별하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자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했다. 여기에서도 포스트모던 영화라는 게 시작되는데, 실험의 가장 단적인 예로 서사를 보여주는 영상예술이라는 관념을 떠나 서사가 없는 이미지와 메시지들을 이어 붙이는 방식을 행했다. 그렇다면 다시, 강원제 작가가 특정한 대상을 그리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과정)에 집중하며 서사가 배제된 행위에 집중하여 중첩하거나 뭉치는 방식으로 재창조된 작품에서의 원본성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원본을 끊임없이 폐기하여 새로운 모델로 교체하는 작가의 작업이 새로운 은하계를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수행의 과정에 밀도가 높아진 예술 행위가 중력 없는 우주에서 가벼움으로 교체하며 새로운 은하를 상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양한 우주론들이 증명할 수 없는 우주의 생성 과정처럼 회화의 완성 시점을 알 수 없음에, 그리고 그 행위(과정)에 무게를 두고 다시, 제로(0)의 상태로 복기하는 그가 한 지점에 정지하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하며, 중첩되어 응집한 작품들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가치의 기호로서 작동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원본성은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관람자들의 다양한 해석에 맡겨 보고자 한다.

 

이미 사라진 과거에서 현재 변화된 감정으로 회화의 원본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들을 얼기설기 겹쳐 감각을 재구성하며, 실험적 과정에서 기호로서 생성되는 강 작가의 작품과 실험적이며 기호학적인 소설 전반에 흐르는 ‘환상성’을 현실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칼비노의 작업 세계는 마치 평행이론처럼 같은 패턴으로 전개되고 있다. 또한 강 작가의 ‘카이로스의 시간 (The time of Kairos)’ 이라는 작품에서는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는데, 삶과 죽음도 시작과 끝이 같은 하나의 순환 속에 있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에 두고 무한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완성’이라는 끝을 찾는 질문은 결국 무의미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도 그의 회화 조각들이 매우 기호학적이라 해석되는 부분이다. 원본에서 해체되어 형태를 바꾸며 현실의 지도를 재구성하는 강원제 작가의 ‘순환성’이 칼비노의 작품에서는 그 모습을 바꾸며 새롭게 생성되는 초월적인 존재 크푸우푸크(Qfwfq)를 통해 표현되며, 이 둘은 각자의 표현 방식에서 기호를 고르고 제외하고 교환하고 결합하여, 교환되고 조합한 언어로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강원제 작가가 원본에서 잘린 조각천을 뭉치고, 콜라주 형식으로 붙이는 ‘카오스모스(Chaosmos)’ 처럼 원본을 알아볼 수 없게 해체하는 과정이 우주의 시작하는 혼돈의 시점에서부터 시작과 끝이 순환하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질문하는 동시에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이, 칼비노 또한 그의 소설 『우주만화』에서 우주를 다 아는 것처럼 썼지만, 결국 우주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음을 알린다. 결국 우리는 누구이며? 예술 언어는 무엇인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시작된 질문이 우주를 향한다. 그리하여 이들이 복잡하게 뒤얽힌 물질과 형태와 기호들로 각각 ‘수행성’과 ‘환상성’으로 원본을 훼손시켜 사라져 가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현실을 바탕에 두고 아무것도 없었던 우주 생성의 처음의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무한 반복 행위는 때로는 사색적이며 동시에 무한함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무한소(無限小, infinitesimal)와 원자를 다루는 강원제 작가의 대상을 그리는 행위(과정)에 집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과정은 시작과 끝이 같은 순환하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크푸우프크(Qfwfq)와 같이 새로운 우주를 채우기 위해 확장하며, 프프우프프(Pfwfp)와 끝없이 서로를 쫓지만 둘의 거리는 좁혀졌다가도 멀어지기도 하며 상대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그와 그의 예술 행위는 <끝이 없는 게임(Games Without End)>처럼 계속해서 질문하며 확장해 나아갈 것이다. 작가의 다음 과정과 행보를 기대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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