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rift | 유영
전시 서문 | 최재우 (중정갤러리)
1. 붓이 한 번 지나간 자리를 다시 보지 못한 채 다음 붓질로 넘어가는 것. 그렇게 그려진 화면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사라진 그림이 어느 날 자른 자국을 따라 손을 떠나 더 작게 분해되고, 더는 내가 처음에 그렸다고 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되돌아오는 것. 강원제의 그림은 그렇게 그려지고, 그렇게 그의 손을 떠난다. 그는 그림을 마치지 않고, 다음 단계로 흘려보낸다. 〈 Zero Painting (제로 페인팅) 〉 의 캔버스 두루마리 위에서 그려진 화면은 측면의 롤에 즉시 감겨 사라지고, 〈 Found Painting (파운드 페인팅) 〉 의 절단대 위에서 그 화면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잘려 나가며, 〈 Chaosmos (카오스모스) 〉 의 평면 위에서 그 조각들은 먼지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새로운 형태를 보인다. 어느 단계에서도 그림은 "이제 완성되었다"고 말할 자리를 갖지 않는다. 그려지자마자 다음으로, 잘려 나가자마자 또 다음으로,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강원제는 〈 제로 페인팅 〉 에 관한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에서, 완성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끝없이 이어지는 캔버스 위로 그저 붓질을 이어갈 때 비로소 "나는 '제로'라는 무한의 공간에 접속하여 화면을 유영하기 시작한다"고 적었다. ‘유영( 遊 泳)’ 은 정해진 목적지 없이 물 위를 떠다니되, 자의적으로 몸을 움직여 떠 있는 것을 뜻한다. 작가는 무한한 화면 위를 그렇게 헤엄친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이 그의 손을 떠나 잘리고 흩어지기 시작하면, 그림 쪽의 떠있음은 조금 다른 성격을 갖는다. 작가의 의지가 아니라 절단의 규칙이, 그가 정한 방향이 아니라 우연이 그림을 다음 자리로 옮겨 놓는다. 전시의 영제목 ‘adrift’가 가리키는 쪽에 더 가깝다 — 닻을 거둔 배가 바람과 물결에 따라 흘러가듯, 손을 놓은 채 흐름에 맡겨지는 떠 있음. 강원제의 작업 안에는 이 두 가지 떠 있음이 함께 있다. 작가가 화면 위를 유영하는 동안, 그가 그린 그림은 그의 손 바깥으로 떠내려간다. 이번 전시의 제목 《 Adrift | 유영 》 은 그 두 ‘떠 있음’을 동시에 짚어준다. 한 작품의 상태가 아니라 한 사람이 회화에, 그리기라는 행위에 부여한 시간의 이름이다. 강원제에게 ‘그리기’는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떠나는 일이고,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과정이다. 때문에 ‘그림’은 완성물이 아닌 부산물로 여겨지며, 작업 과정 속에서 처음의 의도, 혹은 목적지는 점차 희미해지고 결국 증발해 버린다. 그는 한 시리즈에서 다른 시리즈로 그림을 흘려보내며, 매번 자신의 손에서 그림을 풀어준다. 이 전시는 그렇게 놓아진 그림들이 서로 다른 단계에서 떠 있는 풍경이다.
2 Zero
작가가 한 번에 마주할 수 있는 화면은 지금 붓 끝 아래의 면뿐이다. 두루마리 캔버스는 한쪽에서 풀려 나오고 다른 쪽에서 말려 들어간다. 막 그린 이미지는 곧 시야 바깥으로 말려 사라지고, 새하얀 다음 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화면의 시작도 끝도 작가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한 작품인지 묻는 일조차 의미를 잃는다. 기존의 〈 제로 페인팅 〉 에서는 무지개, 구름, 노을, 별똥별 처럼 우리 주변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금새 사라지는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동화적이고 생동감있게 캔버스 표면 위에 그렸다. 하나의 완결된 풍경이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도달 이전의 우연한 현상 혹은 순간을 포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 제로 페인팅 〉 은 한 점씩 조명을 받으며 벽에 걸려 전시가 된 적도 있었고, 작가는 이 방식이 ‘그림은 완성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자신의 작업 철학과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리기는 결과물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흘러가는 과정의 일부여야 하는데, 잘 그려진 한 장면이 단독 작품으로 따로 떼어져 멈춰 서는 순간, 〈제로 페인팅〉은 자기 안에서 모순을 안게 되었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 제로 페인팅 〉 은 그 모순을 안에서부터 닫는 쪽으로 다시 설계되었다. 그려진 화면은 측면의 롤에 즉시 감겨 더는 보이지 않고, 작가는 자신이 그려낸 이미지의 전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다음 붓질로 넘어간다. 더 중요한 변화는 따로 있다. 이제 〈 제로 페인팅 〉 의 그림은 한 점의 캔버스로 잘라낼 수 없다. 모든 그림은 하나의 롤 안에서 끊김 없이 이어져 있고, 비로소 강원제가 줄곧 말해 온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일관되게 존재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닫힌 구조가 오히려 작가를 자유롭게 한다. 어느 지점에서 멈출지, 어떤 그림이 되어야 할지를 묻지 않게 된 화면 위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작업 안의 무한한 공간으로 깊이 들어선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다만 다음 붓질 쪽으로. 이것이 그가 ‘유영’이라 부른 상태다 — 무한한 화면 위를, 목적지 없이, 그러나 자신의 움직임으로 떠다니는 일. 〈 제로 페인팅 〉 은 유영이 일어나는 공간이며, 그 흔적이 다음 시리즈로 떠내려갈 준비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3. Found
이번 전시가 발표하는 또 하나의 큰 변화는 〈 Found Painting (파운드 페인팅) 〉 이라는 새로 명명된 시리즈이다. 작가가 지난 몇 년간 진행해 온 〈Selected/Unselected Painting (선택된/선택되지 않은 그림)〉(2020–2023) 시리즈가 수정, 보완되어 처음 공개된다. 이전 제목에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작가가 〈 제로 페인팅 〉 의 어느 부분을 남길지 직접 골랐다는 뜻이다. 〈 파운드 페인팅 〉 에서는 선택이 아닌 수용으로 태도가 바뀌었다. 〈 제로 페인팅 〉 에서 그려진 화면은 일정한 간격의 지그재그 절단 틀을 통과하며 잘려 나가는데, 어떤 부분이 남고 어떤 부분이 사라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사전에 정해진 그 절단의 엄격한 규칙이다. 작가는 규칙이 남긴 것을 그저 받아들인다. 그렇게 남겨진 그림은 사뭇 낯설게 다가온다. 분명히 자신의 손에서 나왔지만, 자신이 만든 결과라고 말하기에는 이미 멀어진 무언가가 된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은 그의 손을 떠나 어딘가에서 떠다니다, 어느 날 그의 앞에 다시 도착한 발견물처럼 그와 마주하게 되고, 〈 파운드 페인팅 〉 은 바로 그 마주침에서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작가가 자기 결정권을 시스템에 넘긴 것은 강원제가 처음이 아니다.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는 1949년의 한 강연에서 "나는 할 말이 없으며, 나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I have nothing to say and I am saying it)”라고 적었고, 그 위에서 동전 던지기와 주역( 周 易, I Ching )을 작곡의 결정 시스템으로 끌어들였다. 작곡가의 의도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절차가 음을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강원제의 지그재그 절단도 회화에서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작가의 미적 판단이 아니라 규칙이 결정하고, 작가는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가 손을 놓았기 때문에 비로소 그림은 떠다닐 수있게 되고, 떠다니기 때문에 다시 발견될 수 있다. 능동적으로 유영하는 작가와 수동적으로 떠내려가는 그림 — 〈 제로 페인팅 〉 에서의 유영이 끝나고, 이어서 다룰 〈 카오스모스 〉 의 떠내려감이 시작되는 경계선에서, 강원제의 작업 안에 존재하는 두 떠 있음이 〈파운드 페인팅〉에서 비로소 한자리에서 만난다.
4. Chaosmos
〈파운드 페인팅 〉 을 통과한 이미지들은 〈 카오스모스 〉 에 이르러 더욱 작은 조각들로 분해되고 해체된다. 잘리고 흩어졌던 파편들이 다시 모여 평면 위에 콜라주 되거나, 둥글게 뭉쳐져 입체물이 되는 등 여러 다른 모양으로 새롭게 자리 잡는다. 강원제의 전반적인 작업 세계를 단계별로 찬찬히 이해하기에 앞서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면, 꽤나 낯설게, 혹은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통상적으로 한 번 그려진 작업을 파괴하고 다음 작업을 위한 재료로 다시 사용한다는 개념은 우리에게 서먹하게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리즈명은 '질서(cosmos)'와 '혼돈(chaos)'을 합친 말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우주의 먼지들이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의 별을 이루는 것처럼" 이 평면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그 별은 영영 별로 남지 않는다. 모인 것은 다시 흩어지기 위해 모이고, 흩어진 것은 또 다음 조합을 기다린다. 〈카오스모스〉는 어느 한쪽에 머물지 않고 그 사이를 오간다. 이시리즈는 강원제 작업의 끝이 아니다. 현재까지의 작가의 작업 과정을 미루어 보았을 때, 〈 카오스모스 〉 시리즈 또한 완성된 마지막 단계로서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전 시리즈들이 그래왔듯 또 다른 형상으로 끊임없이 변형되며 과정의 한 일부로 지속될 것이다. 5 《Adrift | 유영 》 은 두 공간에서 동시에 열린다. 중정갤러리 는 〈 제로 페인팅 〉 부터 〈 카오스모스 〉 까지의 전 궤적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준다. 작가가 화면 위를 유영하던 순간, 그가 그린 그림이 그의 손을 떠나 떠내려가던 순간, 그리고 그 떠내려간 그림이 어딘가에서 발견되어 다시 그의 앞에 도착하던 순간이 한 공간 안에서 차례로 이어지고, 떠 있음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한 번에 펼쳐진다. Side Room 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머문다. 작가의 손이 그림에서 물러나고 그림이 그의 바깥으로 떠내려가기 시작하는 순간, 〈 파운드 페인팅 〉 이라는 그 한 단계만을 가까이서 들여다본다. 한쪽은 흐름의 길 전체를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그 길의 한 지점에 멈춰 선다. 같은 작업을 두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다. 두 공간을 오가는 동안 관람객은 강원제가 그림에 부여한 시간을 자신의 발걸음으로 따라가게 된다. 한 공간에서 본 그림이 다른 공간에서 다시 떠오르고, 다른 단계의 모습으로 거기 가 있는 것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