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모스 - 강원제 회화의 지금, 여기
김지영 (독립 큐레이터)
강원제는 화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고 의심하며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 답을 찾아가는 작가이다. 그런데 막상 누군가 내게 강원제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지 묻는다면 아마 즉답하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이든 잘 그리는 화가이지만 이미지를 박제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고 화면 속에서 일관된 주제 의식을 표현하거나 고유의 화풍을 구축하는데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그림들은 멈춰있지 않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형태의 변주를 거듭한다. 작가는 그리고 싶은 것을 꾸준히 그리는 행위에 집중하고 그 과정에서 하루하루를 ‘그리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은 그리기가 끝난 후 발현된다. 강원제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그림이 지금에 이르게 된 경로를 살펴야 한다.
작가는 주관적으로 선택하고 편집한 풍경과 사물을 캔버스에 옮기던 주제 중심의 회화를 벗어나 설치 작품에 가까운 지금의 <카오스모스> 작업으로 발전하게 된 전환점으로 <러닝 페인팅 Running Painting>(2015-2019) 을 이야기한다. 러닝 페인팅은 작가가 결혼 후 육아를 병행하며 약 4년간 수행하듯 매일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24분 48초짜리 영상으로 축약해 담은 작품이다. 영상 속에는 거대한 캔버스 앞에 카메라를 등진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1초 단위로 빠르게 지나간다. 화폭에 담기는 그림의 주제와 표현은 각양각색으로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리는가 하면 과감한 색면 추상이 등장하기도 하고, 섬세한 연필 드로잉부터 물감 흩뿌리기까지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공들여 명화를 모사하거나 디즈니 캐릭터를 그리기도 한다. 마치 그리기를 멈추면 화가의 정체성이 사라질 것처럼 작가는 매일 무엇인가 그리는 행위를 지속한다. 물 위에 그리는 그림처럼 화면에는 이미지가 가득 찼다가 비워지기를 반복하고 작품의 완결은 한없이 유예된다.
강원제는 이미지란 허상에 가까워 도달해야 할 결과가 아니며 자신에게는 그리는 과정의 진실성이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러닝 페인팅에서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오브제 중심의 예술 작품을 탈피하고 창작 과정마저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이려 했던 1960-70년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프로세스 아트의 흐름과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성취를 배제한 반복적인 과정이 주는 피로감 때문인지 이후의 작업들은 러닝 페인팅에서 보여준 다소 강박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면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보이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작가는 러닝 페인팅 시기에 생산한 다량의 평면 회화를 파이프 구조물에 빨랫감처럼 차곡차곡 널어 <부차적 결과 By-product>(2018)라는 제목의 설치작품으로 선보인다. 크기별로 정리되고 집적된 회화는 이미지를 잃은 대신 부피와 질감을 얻어 조형성을 획득하고 그리기 행위의 시간과 과정을 시각화한다. 작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작품에 사용된 그림 중 일부를 부분적으로 잘라내 가로세로로 병치해 2020년 <선택된 그림Selected Painting> 이라는 새로운 대형 회화를 선보였고, 자르고 남은 캔버스 더미를 메달아 <선택되지 않은 그림Unselected Painting> 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한다. 이처럼 작가는 일기처럼 그려온 그림들을 재료로 삼아 새로운 형식의 회화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회화를 매체로 한 일련의 작품은 이미지의 레이어를 겹치며 한 화면 안에 미처 다 드러내지 못한 작가의 색을 다층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카오스모스Chaosmos>(2022) 시리즈는 <선택되지 않은 그림>을 더욱 잘게 해체해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 것이다. 2021년부터 시작한 이 작품은 사각 프레임에 회화의 파편을 콜라주 형식으로 덧붙여 새로운 페인팅을 만든다거나 조각천을 공 모양으로 뭉치는 등 이전의 작업에 비해 좀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 이제 그림은 더 이상 원본을 알아볼 수 없게 해체되고 공간 속에서 색상값과 위칫값을 가지는 하나의 픽셀로 작용한다. 이 지점에서 작품의 제목 '카오스모스(Chaosmos)'는 꽤 흥미로운 작명으로 보인다. 본래 카오스(Chaos)와 코스모스(Cosmos)는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개념으로,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인 카오스에 질서가 생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카오스가 아닌 코스모스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는 혼돈이면서 질서이기도 한 카오스모스는 무엇을 뜻할까? 아마도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하나의 우주가 아닐까 한다. 카오스모스는 회화의 관점에서 참조를 잃은 완전한 무질서의 상태처럼 보이지만 원형을 탈피한 회화는 다른 무엇으로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다. 회화는 이제 표면을 벗어나 공간 속에서 부피와 무게를 조절할 수 있고 색과 질감을 재편집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어 굳이 원본을 유추할 필요 없는 독립적인 작품으로 작동한다. 마치 자연에서 꽃이 핀 자리에 씨앗이 맺히듯 한때 완성되었던 회화는 창작의 과정과 시간을 응축한 작은 카오스모스 덩어리가 되어 화가의 실존을 증명한다.
<러닝 페인팅>부터 <카오스모스>에 이르는 작업 방식의 변화는 자신을 그리는 존재로 인식하던 강원제가 점차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각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전환되면서 강원제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미지가 탄생하고 완결되었다가 해체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생산되는 부산물들의 물질성에 주목하고 이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 과정에서 함께 드러나는 것은 작가의 부단한 노동과 작업의 양이며 해체 과정에서마저 조화의 순간을 찾아내는 작가적 본능이다. 작품은 단순히 파괴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태어나기 위해 해체된다. 작품은 완성되는 지점에서 새로운 작품의 소재가 될 가능성을 품는다. 따라서 지금 당신이 강원제의 작품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그 작품의 현재인 것이다. 전시장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작품은 지금, 여기에만 존재하는 작가의 우주이다.
동그란 카오스모스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신화 속의 시시포스(Sisyphus)가 밀어 올린다는 바위가 연상된다. 신들의 형벌을 받은 신화 속 주인공은 무거운 바위를 전력을 다해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리지만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지고 그는 다시 바위를 밀어올리기 위해 빈손으로 산을 내려온다. 스스로 선택한 예술가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성실하게 그림을 그리는 한 화가가 애써 완성한 작품을 해체하고 그 부산물로 전혀 다른 형식의 작품을 만들어 관객의 평가 앞에 서는 모습은 어쩐지 빈손으로 산을 내려오는 시시포스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카오스모스 너머의 무엇, 그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시 바위를 지고 산을 오르는 시시포스처럼 작가는 오롯이 혼자 그다음을 만들어 갈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다루는 방식은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섣불리 예술적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시시포스의 바위가 그의 것이듯 강원제의 그림도 그만의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여기 작가가 찾아낸 카오스모스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