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과 반복: 프로세스 페인팅(Process Painting)

 

김석모 (미술사학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면서 회화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다. 서구 전통회화가 환영(Illusion)을 추구했다면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린 모더니즘에 접어들면서 회화는 그것의 매체적 속성인 평면으로 돌아 왔다. 환영에서 평면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빛과 색과 형태가 대상으로부터 해방되었고, 현실을 모방하고 재현하던 그림은 회화적 공간과 회화적 현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여정은 대상성이 사라진 추상이라는 중요한 기착지에 도달하게 된다.

 

전통회화가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에 집착했다면 세계의 모방이라는 과제에서 해방된 모더니즘 미술가들은 대상이 사라진 회화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만 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1940년대 후반 특히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부 모더니스트들은 완성된 결과물 대신 그리는 행위 그 자체에서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감지했다. 하지만 어떻게 행위만으로 회화적 정당성이 담보될 수 있을까? 결국 이들의 질문은 돌고 돌아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작가 강원제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전시공간에 설치된 작품들은 모두 다섯 개의 유닛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사용 비계에 널려 있는 색 뭍은 캔버스, 그 옆 바닥에는 겹겹이 접합된 사각 캔버스 묶음들이 놓여 있다. 공처럼 생긴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 뭉치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고, 공중에는 느슨하게 뭉쳐진 캔버스가 매달려 있다. 이것들은 다 무엇이며 각각의 작품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모든 실마리는 전시장에 설치된 모니터 영상에 담겨 있다.

 

2008년에서 2011년 작가 강원제는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는데 몰입해 있었다. 오브제를 사진에 담고 그것을 다시 그리는 방식을 반복하면서 지루함을 견뎌야 했고 결국 방법론적 문제에 부딪히면서 작업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2012년 선보인 ‘유기적 사물들(Organic object)’에서는 개별 오브제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여러 사물들의 군집된 형식에 집중했다. 이때 작가의 생각을 지배했던 개념은 서로 다른 것들이 ‘마주침’으로 발생되는 ‘생명력’ 그리고 이를 통한 ‘생성’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이어져 ‘마주친 사물들(Encounter)’이라는 새로운 연작이 탄생했다. 얼마간의 공백기를 거친 미술가는 화가로서의 자기정체성에 의문을 품었다.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이 예술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을’그리는데 있지 않고 ‘그리기’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지점에 다다른 후 결과로서 취하게 되는 그림이 아니라 그곳을 향해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그리는 행위 자체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또 다른 실험을 감행한다. 그 회화적 실험을 기록한 것이 전시장에 함께 설치되 어 있는 영상이다.

 

‘러닝 페인팅(Running painting)’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그리기 프로젝트는 2015년에 시작되어 무려 4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러닝 페인팅을 진행하면서 지켜야할 원칙은 오직 하나, 매일 그리되 그리는 행위를 1초씩 영상에 담는 것이었다. 무엇을 그려야 한다는 자기 의무감으로부터, 특정한 주제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냥 무엇이든 매일 자유롭게 그리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본 것, 경험한 것, 느낀 것, 상상한 것, 생각한 것 혹은 연습한 것, 실패한 것, 그리다 멈춘 것 등 모든 것이 그림이 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남겨진 그림에는 무작위적인 이미지들만이 남았을 뿐이지만 결국에 작가가 획득한 것은 자유였다.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지만 사실 이 과정은 자기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방편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축적된 4년간의 그리는 행위가 24분여의 영상에 담겨 있다.

 

2019년 돌연 미술가는 러닝 페인팅 종료를 선언했다. 그 이유는 뭘까? 시간이 지날수록 매일 그리는 행위가 의미 없는 루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때의 감정을 작가 스스로는 이렇게 드러낸다. “마치 마침표 없이 써 내려가는 듯 긴 문장의 무의미함”같았다고. 그렇다.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의미를 찾기 위해 진행된 반복된 행위에서 무의미를 마주하고 다시 의미라는 출발점으로 돌아 왔다. 그래서 스스로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4년의 시간, 24분의 흔적. 그 사이 그림이라는 부산물이 남겨졌다. 미술가는 그 부산물 중 일부를 선택했고 이것은 ‘선택된 그림(Selected painting)’이 되었다. 선택은 불가분 선택되지 않은 부분을 낳게 마련이다. 그렇게 나온 것이 ‘선택되지 않은 그림(Unselected painting)’이다. 선택된 그림들은 이미지가 드러나지 않도록 겹겹이 접착했고 이것은 다시 ‘무거운 그림(Weighty painting)’이 되었다. 선택되지 않은 그림들은 죽은 동물의 가죽처럼 늘어져 비계에 걸리거나 더 잘게 조각나 뭉치로 바닥을 구르고 천장에 매달렸다. 하지만 선택된 것과 선택되지 않은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가?

 

강원제의 작업은 전체가 하나다. 현재와 과거, 결과와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원제의 작업에는 종결된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종결은 또 다른 시작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순환과 반복, 행위의 순환과 반복. 순환과 반복 사이에 벌어진 좁은 틈이 다음 작업을 위한 발아점이 된다.